선인仙人은 정제된 외로움과 그리움, 서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아무렴 굳어진 가슴으로 무슨 사랑을 할 터이냐.

 

우주 안에서 외로움을 아는 자가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리움을 수시로 느끼는 자가 바로

본향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서러움을 아는 자야말로

진정 타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가 되리.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잔잔히 바라보고 즐길 수 있겠니.

외로움을 즐기라고 하였거늘,

기회가 올 때마다 외면을 하는구나.

 


그 안에 침잠해서 고요히 푹 빠져 본다면

네가 온 곳을 향한 강한 이끌림으로

저도 모르게 호흡이 깊어지리니

아이야, 외로움이 찾아오면

반갑게 앉아 보아라.

 


그곳에서 트이고 가게 되는 곳이 있으리니

그저 한없이 노를 저어라.

가고 가다 보면

네가 닿는 그곳에 황금빛 꽃 피어나

그간의 외로움을 어루만저 주리라.

너의 온갖 서러움이 꽃으로 화하리라.

그리움이 정녕 그곳에 닿아

하늘을 돌아 하늘로 가는 길로 안내하리라.

 


개인의 상념을 버리고

우주의 외로움으로 들어 보아라.

우주는 그 외로움으로

버티고 존재하느니라.

 


저기 어린 눈망울들이 하나같이 반짝거리며

외로움, 서러움, 그리움으로

아롱거리는 것이 보이지 않니.

하늘하늘 날아서 꽃을 피워 주어라.

너의 있는 자리가 그런 꽃밭이 되게 하여라.

 


그런 존재가 되어라.

그리하여 그 모든 외로움과 그리움과 서러움은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보답 받으리.

실로 황금빛으로 찬란할

하늘의 성일러니

그것을 보리라.

그곳에 닿으리라.

 


기쁨의 춤을 나와 함께 추리라.

 

-황진이 <너는 사랑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리움이라 말한다>-

 

 

정말 딱 일주일만 황진이를 만나보고 싶다.

급 궁금해진다.

황진이의 시재들을 읽어보면 진정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 보는 여인이었을 터.

그녀의 깊이와 애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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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일때 우리의 뇌는 양육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했다. 양육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전달한 감정과 태도,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뇌의 성장에 반영된다. 원만한 양육환경 속에서

자랐다면, 부모님이나 양육자들이 우리의 기분이나 정서상태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살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울고 웃으며 느끼는 것에 대해 적절히 답을 하고 반응해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살 정도가 되면 사람의 뇌는 이미 자기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패턴을 갖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좌뇌 역시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육된다.

이런 이원적인 발달 덕분에 양쪽 뇌가 어느 정도 통합될 수 있는 것이고, 이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좌뇌를 활용하여 우뇌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양육자들이 고의로, 혹은 무심코 아기의 기분을 무시하거나 그 기분에 대해

벌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 시기에는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언어로

이해하는 능력을 배워야 하는데,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 제대로 연습하지 못하면 그런 능력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른이 된 이후에도 문제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유아기에 양육자들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했거나, 유아기 이후에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어 안정상태가 깨진다면, 장차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커진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떻게 이미 지나간

유아기를 되돌려 양육자와 더 행복한 시간을 갖고, 이미 겪어버린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다도 방법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경로를 변경하는

일은 가능하다. 심리치료사들은 '어떤 사람이나 문화의 특징들을 자신의 정신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내사(introjec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양육의 경험을

내사하여 유아기에 양육자들이 남긴 영향을 계속 떠안고 살아가는데, 그럼으로써 감정, 생각, 반응,

행동의 패턴들이 심화되고 고착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부모님이 좋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면, 좀 더 온전한 정신을 갖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패턴을 변경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렇다면 이미 익숙해진 생각들의 패턴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불행히도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 옴짝달짝할 수 없는 꽉 막힌 삶에 점점

깊이 박혀버리거나, 반대로 더 압도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진다면(혹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약물치료든 새로운 행동양식이로든 무엇이라도 해서 더 이상의

추락을 막아야 할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운 행동양식'이라는 것은, 인생의 초점을 새롭게

맞추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생각들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움을 얻는

일일 수도 있다(굳이 내가 이렇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언가'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심리치료 케이스들을 살펴보다 보면, 예외 없이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기관찰(self-observation), 타인과 관계 맺기, 유익한 스트레스, 개인적인 내러티브(narrative)에 대해서

말이다. 이 네가지는 심리치료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에 활용해보면 좋은 것들이기도 하다.

온전한 정신을 지키고, 성장과 발전에 꼭 필요한 유연성을 갖도록 도와주는 이 네 가지 영역이,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다.

 

1. 자기관찰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앟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좀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온전하고 지혜로운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심판관 같은 태도를 버리고 먼저

자기를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자기관찰 능력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관찰 훈련을 하다 보면, 가정과 느낌, 생각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감정, 느낌,

생각이 기분과 행동을 결정할 때, 그것을 경험하고 인지하고 평가하기 위해 제3자의 시선을

가지게 된다. 이런 능력을 키우면 어려운 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운 태도를

가질수 있고 사사건건 판결을 내리려는 태도도 없앨 수 있다. 또한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뿐만 아니라, 감정과 논리에 귀 기울이고 그 두 가지를 종합할 줄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관찰 능력을 최대한 키워 궁극적으로

자기인식(self-awareness) 능력을 높여야만 한다. 아마도 이것은 누구에게나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안는 숙제일 것이다.

 

2. 타인과 관계 맺기

누구에게나 의지를 북돋아주고 격려해주는 안전하고 믿음직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연인도 포함된다.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로맨스가 반드시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관계는 꼭 필요하다.

그 대상이 심리치료사이건, 혹은 선생님이나 연인, 친구, 자식 등 누구이건 간에,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뿐 아니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심지어 슬쩍슬쩍 자극을 주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하며, 지속되는 일련의 관계들을

통해 발전하고 변화한다.

 

3. 유익한 스트레스

올바른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자극을 준다.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자극을 주되,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일상이

뒤집어질 만큼 위압적이지는 않은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유익한 스트레스다.

또한 유익한 스트레스는 새로운 신경연결을 유도하는데, 이것은 인격의 발달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4. 개인적인 내러티브

내러티브란, 말 그대로 서사, 서술, 줄거리, 스토리텔링 등의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잘 안다는 것은, 필요할 때 그 이야기를 편집하고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자아 중 상당 부분이 언어능력을 습득하기 전에

형성되는 탓에, 우리를 이끄는 신념이나 믿음들 중에는 자신조차 모르게 감추어진 것들도 있다.

한편, 우리는 "나는 ...한 사람이다."라거나 "그렇게 ㅎ는 것은 나답지 않아. 난 ...한 사람이 아니니까."

라는 식의 믿음들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자신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타인들과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더 새롭고 더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영역은 누구에게나 온전한 정신의 토대가 된다.

 

- 인생학교 <정신>, 필립파 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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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 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테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 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를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이것이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했던 문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빛-어둠, 두꺼운 것-얇은 것, 뜨거운 것-찬 것, 존재-비존재와 같은

반대되는 것의 쌍으로 양분되고 있다.

그는 이 모순의 한쪽 극단은 긍정적이고 다른 쪽 극단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이론은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선명한 것, 뜨거운 것, 가는 것, 존재하는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나누는 극단적 이분법이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단 이 경우는 예외다. 무엇이 긍정적인가? 묵직한 것인가 혹은 가벼운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미묘한 차이는 존재하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고 구별해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

권태안에서도 극복할 수 있고 행복을 찾아낼 수 있것만

순간의 즐거움과 자극만을 행복이라 착각하며 즐거움이라 쫓는 사람들..

순간의 즐거움은 있을지언정 그래서 자기만의 것이 없는 사람들은 늘 삶이 허무하다.

가끔씩은 EVEREST COFFEE와 함께 밀란 쿤데라를 만나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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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 혹은 대중심리서를 많이 읽었거나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심리치료사들의 강의를

자주 들은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남들보다

더 잘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한 일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10대 청소년 시기를 지날 때, 직업을 갖게 되었을 때,

과도한 업무에 시달릴 때 그리고 점차 나이를 먹어 늙어갈 때 등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표준적인 범주에서 동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인간의 DNA 차이로 인해 처방약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므로

같은 질병이라 해도 환잔에 따라 치료법과 처방약이 다르다고 안내한다.

물론 유전자가 동일한 사람은 없다는 매우 근원적인 전제하에 말이다.

예를들어, 환자의 혈전을 안전하게 예방할 수 있는 혈전치료제의 투여랑은 환자가 약물을 얼마나 빨리

흡수할 수 있는 유전자를 자졌는가에 달려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삶에서 맛보는 좌절이나 기쁨, 사회적 관계나 연인 관계 등에서 겪는 난관이나

즐거운 경험들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이를 어떻게 새로운 역량으로 키우는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DNA가 다를 뿐만 아니라 뇌 활동의 패턴도 다르기 때문이다. 환자의 DNA를 해독하게

됨에 따라 미래 의학분야의 전개 방향이 달라진 것처럼, 우리 각자의 개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정서적 기질과

정서 상태를 좌우하는 뇌의 특징적인 패턴을 이해함으로써 오늘날 심리학의 전개 방향이 달라지고있다.

 

유사한 배경에서 살아왔으나 동일한 인생 경험과 사건에 처했을 때 매우 극적으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어떤 사람은 잘 극복했지만

어떤 사람은 완전히 무너졌다. 후자의 경우 그들은 매우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반면 전자는 좌절을 잘 극복하고 이겨낼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오리혀 이를

통해 이득을 보기도 했다. 이것이 수수께끼였다.

저자는 이혼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실직, 그 외에도 많은 좌절에 처했을 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반응을 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고 한다. 반대로, 진정한 쟁취했을 때나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처럼 인생에서 좋은 일이 생길 때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나타내는 이유도

궁금했다고 한다. 왜 이처럼 수많은 삶의 굴곡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정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연구를 통해 얻은 답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서 유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서 유형은 그 종류와 강도, 지속 시간 등에 매우 다양한 정서 반응과 대처 대응력 등을

합한 것이다. 독특한 지문과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저마라 독특한 정서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지는 일처럼 아픔을 겪게 될 때도 어떤 사람은 굉장히 빠르게 회복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자기비하와 절망으로 나락에 빠지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를 파악하고 설명하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정서 유형이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형제와 자매라고 하더라도

누구는 실직을 해도 금방 떨치고 이어나는 반면, 누구는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서 좌절하는 이유도 정서 유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자녀가 학교야구 경기에 잘못된 판정을 받아 퇴장당한 상황에서, 그냥 무시해 버리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대는 아버지도 있다. 이 역시 정서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주변의 많은 친구들에게 끊임없는 위로의 원천이 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족과 친구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냉랭하게 행동하는데, 이 역시

정서 유형의 차이에서 온다. 또 어떤 사람은 타인의 비언어적 표현과 목소리의 톤 등을 마치

광고판의 문구처럼 명확하게 읽어내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를 마치 제2외국어를 대하듯이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러한 차이도 정서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의 반응을 결정하는 정서 유형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수많은 질문이 쏟아질 수 있다.

청년기 초반에 분명히 드러나는 정서 유형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정서 유형이라는 것이 일생 동안 변하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가 등의 질문들 말이다.

또 정서 유형이 신체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서 유형의 차이가 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에 따라나와야 할 질문은 정서 유형이 우리의 신경 회로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정서 유형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인지이다.

그리고 정서 유형은 변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삶의 희로애락을 다룰 수 있는지와 관련된

질문도 중요하다. 이제 뇌가 우리의 정서 유형을 어느 정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뇌는 변화를

어떻게 측정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궁금하다면 리처든 J. 데이비드슨이 쓰신 '너무 다른 사람들'을 추천한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 1984년부터 현재까지 위스콘신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중이시다.  그리고 인간 뇌 활동에 관해 연구하는 와이즈먼 실험실과

신경과학적 정서에 관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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