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독이 나를 유혹했다.

이제 고독은 나의 벗이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고독보다 더 만족스러운 친구가 있을까.

-샤를 드 골-

 

퇴근길 그냥 지나가자 주문을 걸었지만...

나도 모르게 안주 집어들고 맥주를 찾고 있었....


편의점에는 맛난 맥주가 없다. ㅠㅠ

아사히를 집어 들고

음악과 함께 서재서 시간보내기.

 


책 이야기를 꺼낸 건 오랜만인 것 같다.

뭐가 그리도 여유가 없었던건지..

오랜만에 '고독의 위로'를 꺼내들었다.

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했다.

 

마음 자세를 바꿔야 할 때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산이다.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나면 존재의 중요성과 의미에 대한 근본 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

인간관계가 모든 형태의 고민에 해답을 제시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문화에서,

좋은 마음으로 도우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격려도 고맙긴 하지만,

고독 또한 치료에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다.

 


가장 행복한 삶이란

인간관계나 인간관계 이외의 것 어느 한쪽에 대한 관심을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이상화하지 않는 삶일 것이다.

전체를 향한 소망과 추구에는 인간 본성의 양면 모두가 포함되어야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좋은 본성과 너무도 오랫동안 떨어져 시들어가고

일에 지치고 쾌락에 진력이 났을때

고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가.

 

 

 

 

휴일은 틀에 박힌 일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휴일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휴일과 변화하는 능력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후퇴를 뜻하는 'Retreat'란 단어에도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적과 맞섰다가 후퇴를 한다면 이는 곧 패배를 뜻하지만,

후퇴는 다른 의미도 담고 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는 잠, 휴식, 오락을 비롯해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활동을 뜻한다.

 'Retreat'는 '물러나 있는 시간'이나 물러나 있는 장소, 특히 종교적 명상과 조용한 예배를 하는 장소를 의미하기도 한다.

'Retreat'는 1792년에 설립되어 지금도 번성하고 있는 유명한 영국 정신병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의 설립자 새뮤얼 튜크(Samuel Tuke)는 관용, 친절, 최소한의 구속을 병원의 방침으로 내세웠다.

그는 병원이 세상의 '괴로움'으로부터 안전한 '도피처'가 되어주어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의 혼라느러운 마음이 건강하게 변하길 흐망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고독이라는 평화를 얻기가 힘들다.

전화는 끊임없이 사생활을 위협한다.

도시에서 자동차와 비행기, 전차의 소음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이런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에 도시의 거리는 끊임없이

들리는 소리들로 지금보다 더 시끄러웠을 것이다.

자갈길을 달리는 마차의 쇠바퀴 소리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고무타이어 소리보다 더 요란하다.

사실 어디를 가든 소음이 있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소음이 없으면 오히려 불편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무자크Muzak'(상점, 식당, 공항 등에서 배경 음악처럼 내보내는 녹음된 음악)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상점, 호텔, 비행기, 심지어는 엘리베이터까지 침범했다.

운전하는 동안을 휴식시간으로 여기는 운전자들이 있는데,

그 시간만큼은 찾는 사람 없이 혼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차에든 장착된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는 사람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무슨 소리든 들으려 한다는 증거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용 무선전화가 발명되고 이를 설치하는

운전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운전하는 동안이라 해도 누군가가 대화를 청해 온다면

언제든 응하려 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음 방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감각 박탈의 반대, 즉

감각과부하라는 문제는 대체로 무시된다.

오늘날 '초월 명상법'같은 기법들이 유행하는 것은 도시 환경에서 얻기 힘든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져보려는 노력일 수도 있다.

습관적으로 접하는 환경에서 의도적으로 물러나 보면, 스스로를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혼잡스러운 매일의 삶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숙한 곳의 느낌과 접촉하게 된다.

통상적으로 우리의 자의식은 물질세계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 좌우된다.

책으로 들어찬 서재는 내 관심사를 반영하고,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며,

내가 스스로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자각하게 한다.

 

 

내 가족, 동료, 친구들, 그리 가깝지 않은 지인들 등과의 관계는 내가 어떤 시각을 지닌 사람이며

예측컨대 어떠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할 사람인지를 규정한다.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규정하는 요소들에는 한계가 있다.

내가 평소의 나 자신에 불만스러워한다고 가정해보자.

혹은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경험이나 자기 이해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것들을 탐험하는 한 가지 방법은 현재의 환경에서 벗어난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는 필연적으로 위험이 따른다.

마음속에서 새롭게 뭔가가 조직되고 통합되려면 먼저 어느 정도의 해체가 일어나야 한다.

이전의 형태를 붕괴시키고 나서 더 좋은 것이 올지는 경험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모른다.

 

 

 

 

 

오랜만의 책 이야기 참 좋다.

요녀석이 아지트가 서재였것만

내가 음악들으며 떡 버티고 있으니 오지도 못하고

다른공간 책상위에 올라가서 자포자기 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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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일때 우리의 뇌는 양육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달했다. 양육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전달한 감정과 태도,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뇌의 성장에 반영된다. 원만한 양육환경 속에서

자랐다면, 부모님이나 양육자들이 우리의 기분이나 정서상태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살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울고 웃으며 느끼는 것에 대해 적절히 답을 하고 반응해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두 살 정도가 되면 사람의 뇌는 이미 자기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패턴을 갖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좌뇌 역시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육된다.

이런 이원적인 발달 덕분에 양쪽 뇌가 어느 정도 통합될 수 있는 것이고, 이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좌뇌를 활용하여 우뇌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양육자들이 고의로, 혹은 무심코 아기의 기분을 무시하거나 그 기분에 대해

벌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 시기에는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이나 언어로

이해하는 능력을 배워야 하는데, 결정적인 시기를 놓쳐 제대로 연습하지 못하면 그런 능력이

아무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른이 된 이후에도 문제로 남을 수 있다.

그래서 유아기에 양육자들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했거나, 유아기 이후에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어 안정상태가 깨진다면, 장차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확률이 커진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떻게 이미 지나간

유아기를 되돌려 양육자와 더 행복한 시간을 갖고, 이미 겪어버린 트라우마를 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지 않다도 방법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경로를 변경하는

일은 가능하다. 심리치료사들은 '어떤 사람이나 문화의 특징들을 자신의 정신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두고 '내사(introjec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양육의 경험을

내사하여 유아기에 양육자들이 남긴 영향을 계속 떠안고 살아가는데, 그럼으로써 감정, 생각, 반응,

행동의 패턴들이 심화되고 고착된다. 그렇다고 이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부모님이 좋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우울증에 빠지거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면, 좀 더 온전한 정신을 갖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 패턴을 변경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렇다면 이미 익숙해진 생각들의 패턴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불행히도 절대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 옴짝달짝할 수 없는 꽉 막힌 삶에 점점

깊이 박혀버리거나, 반대로 더 압도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진다면(혹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경우도 있다), 약물치료든 새로운 행동양식이로든 무엇이라도 해서 더 이상의

추락을 막아야 할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운 행동양식'이라는 것은, 인생의 초점을 새롭게

맞추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생각들이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부터 도움을 얻는

일일 수도 있다(굳이 내가 이렇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우언가'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어떤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심리치료 케이스들을 살펴보다 보면, 예외 없이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점이다.

자기관찰(self-observation), 타인과 관계 맺기, 유익한 스트레스, 개인적인 내러티브(narrative)에 대해서

말이다. 이 네가지는 심리치료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에 활용해보면 좋은 것들이기도 하다.

온전한 정신을 지키고, 성장과 발전에 꼭 필요한 유연성을 갖도록 도와주는 이 네 가지 영역이,

지금부터 우리가 함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다.

 

1. 자기관찰

소크라테스는 "반성하지 앟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좀 극단적인 말이긴 하지만,

온전하고 지혜로운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심판관 같은 태도를 버리고 먼저

자기를 제대로 관찰하는 능력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자기관찰 능력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자기관찰 훈련을 하다 보면, 가정과 느낌, 생각이 일어날 때, 그리고 그 감정, 느낌,

생각이 기분과 행동을 결정할 때, 그것을 경험하고 인지하고 평가하기 위해 제3자의 시선을

가지게 된다. 이런 능력을 키우면 어려운 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운 태도를

가질수 있고 사사건건 판결을 내리려는 태도도 없앨 수 있다. 또한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뿐만 아니라, 감정과 논리에 귀 기울이고 그 두 가지를 종합할 줄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온전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관찰 능력을 최대한 키워 궁극적으로

자기인식(self-awareness) 능력을 높여야만 한다. 아마도 이것은 누구에게나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안는 숙제일 것이다.

 

2. 타인과 관계 맺기

누구에게나 의지를 북돋아주고 격려해주는 안전하고 믿음직한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연인도 포함된다.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로맨스가 반드시

행복의 필수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성장을 촉진시켜주는 관계는 꼭 필요하다.

그 대상이 심리치료사이건, 혹은 선생님이나 연인, 친구, 자식 등 누구이건 간에,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뿐 아니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심지어 슬쩍슬쩍 자극을 주기도 하는

그런 관계가 필요하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하며, 지속되는 일련의 관계들을

통해 발전하고 변화한다.

 

3. 유익한 스트레스

올바른 스트레스는 긍정적인 자극을 준다. 그렇다면 과연 올바른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자극을 주되,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일상이

뒤집어질 만큼 위압적이지는 않은 것, 그게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유익한 스트레스다.

또한 유익한 스트레스는 새로운 신경연결을 유도하는데, 이것은 인격의 발달과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4. 개인적인 내러티브

내러티브란, 말 그대로 서사, 서술, 줄거리, 스토리텔링 등의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잘 안다는 것은, 필요할 때 그 이야기를 편집하고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자아 중 상당 부분이 언어능력을 습득하기 전에

형성되는 탓에, 우리를 이끄는 신념이나 믿음들 중에는 자신조차 모르게 감추어진 것들도 있다.

한편, 우리는 "나는 ...한 사람이다."라거나 "그렇게 ㅎ는 것은 나답지 않아. 난 ...한 사람이 아니니까."

라는 식의 믿음들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자신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다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타인들과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더 새롭고 더 유연하게

정의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삶에서 벌어지는 사건,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영역은 누구에게나 온전한 정신의 토대가 된다.

 

- 인생학교 <정신>, 필립파 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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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는 혼란상태(chaos)에 빠져 휘청거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계속되는 삶의 위기들 때문에

정신이 없는 부류다. 두 번째 부류는 바퀴자국 같은 과거의 상처에 꽁꽁 묶인 채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쩔쩔매는 사람들이다. 물론 양쪽 모두에 속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독특한 유전자의 조합을 가지고 태어났고, 각기 다른 성장기를 겪었다.

그런 까닭에 좀 더 용감해지고 개방적인 성격이 되어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억제라는 것을(늦었지만 이제라도) 새로 배워야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타인을

신뢰하는 법을 좀 더 연습해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나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탓에 분별력을

좀 더 키워야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또 다른 사람에게는

불행의 원천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유용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로울 수도 있다.

우리의 뇌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달했는지,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작동되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생각의 방식과 감정변화의 패턴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삶의 방식까지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뇌에 대해

이해하고 생각해보는 훈련 덕분에, 나뿐만 아니라 내 환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더 능숙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戰車)'에 비유했다. 전차의 기수가 이성(Reason)이라면

두 마리의 말은 각각 기개(spirit)와 욕망(Appetite)이라고 했다. 정신(mind)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와 비슷한 비유를 해왔다. 나 또한 그런 식의 접근법을 활용해, 현대의 신경과학이 밝혀낸 것들과

그 밖의 여러 심리치료적 접근법을 접목시켜보았다.

 

 


그렇다면 먼저 가장 안쪽에 있는 '뇌간'부터 살펴보자. 종종 '파충류의 뇌'로도 불리는 곳이다.

뇌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작동하며 반사작요와 심장근 같은 불수의근(不隨意筋)의 움직임을 맡고 있다.

또한 생명중추의 기능을 담당해 위험한 순간에 우리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손가락으로 우리의 눈을 찌르려고 하는 순간에도, 뇌간은 우리가 눈을 감게 만든다.

한마디로 뇌간은 소도쿠 같은 것을 풀 때는 도움을 주지 않지만,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단계에서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뇌간의 바깥인 중뇌에는 '포유류의 뇌'라고 불리는 변연계가 있다. '감정의 뇌'라고도 불리며,

인간의 감정과 인식, 기분 등을 담당한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드 포유류들은 흥분하면 으르렁거리고,

공포를 느낄 때는 움츠리며, 애정을 표현하려고 꼬리를 흔들기도 하는데, 이 모든 감정적인 행동들이

바로 중뇌의 발달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진화한 것이 전뇌다. 전뇌는 '인간의 뇌'라고 불리며 이성을 담당한다. 학습, 기억력,

지력을 담당하고, 추론, 의사결정, 언어이해, 자발적 움직임 등의 지적 사고를 조절한다.

한편 우리의 대뇌는 자뇌와 우뇌로 나뉘어져 있고, 가운데에 위치한 뇌량이 다리 역할을 하며

자뇌와 우뇌를 이어준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좌뇌는 논리적이고, 순차적이며, 합리적인 사고를 한다.

말하기, 쓰기, 독서, 듣기(청각)를 관장하며, 언어, 논리, 추론 같은 조직적인 활동을 담당한다.

반면 우뇌는 불규칙적이고, 바조직적이며, 직관적이고 전체론적이다. 감정과 촉각으로 인식하고,

공간감각, 형태의 인식, 음악, 예술, 색감, 창의력, 시각화와 같은 비언어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우뇌와 좌뇌는 평생에 걸쳐 계속 발전하지만, 태어나서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대부분의 발달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각각의 뇌세포들은 혼자서는 아무일도 할 수 없다.

뇌세포들이 제기능을 수행하려면 다른 뇌세포들과 서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뇌는

일련의 발달과정을 통해 각 뇌세포들을 연결하는 신경경로(neural pathway)를 경로한다.

그런데 이런 뇌세포의 연결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우리의

뇌 발달은 유전적인 요인보다는 유년기에 형성되는 인간관계와 더 깊은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타고난 본성보다는 후천적 양육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 이유는, 대체로 아주 어린 시절에 겪은 일상적인 경험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상 우리의 경험이 뇌의 문제를 결정짓는 셈이다.

 

생후 2년 동안 우뇌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는 반면, 좌뇌는 잠잠한 상태에서 그다지 활동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뒤로 몇년 사이에 발달의 양상이 뒤바뀌어, 우뇌의 발달은 둔해지고

좌뇌는 괄목할 만한 활동의 시기에 돌입한다. 우뇌에 깔리게 되는 신경경로는 유아기에 만들어지는데,

그 토대는 타인들과의 유대나 형성이나 결합의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타인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스스로에 대해 전반적으로 얼마나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기분이 상한 후에 얼마나 빠르게(혹은 더디게) 감정을 스스로 추스를 수 있는지에 좌우된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뇌는 주로 감정과 직관, 비언어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타인과의 공감, 조화, 관계에 관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뇌는 좌뇌보다 먼저 발달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 내내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그래서 힐끗 쳐다보거나 냄새를 한 번 맡는 것만으로도

우뇌는 어떠한 상황이든 판단하고 파악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장님이 된

글로스터 백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나는 느낌으로 본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좌뇌는 주로 언어, 논리, 추론을 담당한다. 우리는 경험을 언어로 처리하기 위해, 혹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또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좌뇌를 활용한다.

논리와 증거를 증시하는 과학은 자뇌 덕분에 발전해왔고, 분류학, 철학, 언어학 같은 분류 및

정리 부문의 학문들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태어나서 첫 2년 동안에는 좌뇌의 발달이

우뇌에 비해 현저히 더디다. 언어와 논리력을 갖춘 자뇌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에 먼저 우뇌가

활발히 발달됨으로써 성격의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뇌가 여전히 우위를 갖는

경향에 대한 이유일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간혹 분별 있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이성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는 데도, 나도 모르게 엉뚱하게 튀어나와

곤란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뇌의 분별 있는 부분(좌뇌)이 언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는데도,

종종 다른 부분(우뇌)이 그 언어기능을 조종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내가 방금 무슨 헛소리를 한 거지? 하는 경우). 이것이 바로 우뇌의 우위가 드러난 경우다.

 

- 인생학교 <정신>, 필립파 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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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 감정이 오가는 송신기요, 수신기다.

눈을 통한 감정의 교류는 동물도 할 수 있지만,

서로 꼭 잡은 손은 동물이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교류방식이다.

손을 잡는 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한 통신 수단이다. 부부나 연인끼리 손을 맞잡고 걷는 것은 필수다.

팔짱을 끼는 것은 이별과 분리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며, 의존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로 손을 맞잡은 것은 애정의 확인이며, 혼자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가 '이별 불안'이다.

이 불안은 엄마에게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지면 엄마가 곧바로 달려와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준다.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안심하게 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물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는 초석이 된다.

그런 신뢰를 바탕으로 나중에 커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손을 잡고 걸어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어라.

중요한 것은 둘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어간다는 것이다. 마냥 마주보고 걷기만 하면 앞을 보기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남녀가 서로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이 아니라,

서로 손을 꼭 잡고 정겹게 걸어가는 모습이다. 손을 마주잡고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남녀는 행복하다.

물론 애들을 낳으면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들어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 들지만

애들이 다 크고 나서도 여전히 부부가 서로 손잡고 걸을 수 있다면,

그리고 백발이 되어서도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손이라면 서로 가려운 등을 긁어줄 수도 있고, 서로 손톱을 깎아줄 수도 있으며,

서로 때를 밀어줄 수도 있는 법이다. 더 나아가 서로 힘겨울 때 등을 토닥여주고 포용해주며 땀을 닦아줄 수도 있다.

그러니 손으로 절대로 폭력을 써서는 안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접시를 집어던지고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따귀를 올려서는 안 된다.

이런 습관이 한 번 붙으면 정말 고치기 어렵다. 발을 쓰는 것은 더 나쁘다.

밥상을 뒤엎는 일처럼 인간이 추해보이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부부 간에 언쟁은 피할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설사 그렇다 쳐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상욕은 할 짓이 아니다.

 

분이 풀리지 않으면 차라리 집밖으로 나가 한 바퀴 바람을 쏘이고 오는 것이 낫다.

공원 벤치에라도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상대의 손을 잡고 "내가 잘못헀어, 미안해"라고 말하면 둘 사이의 문제는 눈 녹듯 사라진다.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살다보면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정신분석이 추구하는 최종 목적도 완벽한 인간, 완벽한 삶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서서히 자기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추스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미로의 과정을 통해 마지막 도달하는 깨달음은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다.

 

신기한 마술쇼에 푹 빠진 애들은 마술사의 손을 의심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에 푹 빠진 애들 역시 부모의 손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혼이 날 때조차도

부모의 손에 들린 회초리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도 부모님이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부부도 마찬가지다.

힘겨울 때일수록 손을 내밀어 잡아주고 이끌며 보듬어주는 부부는 진정한 사랑의 마술사들이다.

어쩌다 실수해도 서로를 믿고 그냥 넘어가주는 아량을 보인다.

인간은 진공관 속에 채워진 증류수가 아니다. 온갖 오염된 세상 속을 헤치며 살아가는 생리적 식염수다.

그토록 험한 세파를 헤치고 나가려면 혼자 힘으로는 너무 벅차다.

그래서 서로를 잡아주는 손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하고 밥을 먹고 옷에 단추를 끼우고 구두끈을 맨 후 대문을 나서며 손을 흔든다.

아침마다 헤어지지만 저녁에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과 안도감으로 그렇게 부담없이 헤어진다.

그런 애틋한 손길이 과연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두번 다시 잡을 수 없는 그 손을 영원히 놓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할까? 그러니 우리의 손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그러니 따스한 마음이 담긴 부드러운 손길에 인색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언젠가는 잡고 싶어도 쓰다듬고 싶어도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시간이 온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그러니 주저하고 망설일 필요가 없다.

매일같이 손을 잡고 실컷 걸어라.

그렇게 손잡고 하염없이 걷다보면 모든 허물도 허세도 만용도, 그리고 온갖 이기심과 자존심도

그야말로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지는 법이다.

 

-프로이트를 알면 사랑이보인다-

 

 

 

 

Posted by bluej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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